철들지 않는 소년

영원히 늙지 않은 소년 박철민과 나눈 꽤 진지한 이야기
쉰이 넘은 나이지만 스스로를 철없는 남자라 소개하는 박철민.
영원히 늙지 않은 소년과 나눈 꽤 진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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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썹!” 대학로의 한 공연장에서 만난 박철민은 기자를 두 팔 벌려 힘차게 안으며 반겼다. 마치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내온 사이처럼 말이다. 연예계 안팎에서 이미 파다한, 사람 좋다는 소문이 단번에 실감이 나는데 정작 본인은 그런 말이 영 낯간지러운 모양이다. “제가 속도 없고 철도 없는 사람이에요. 아버지가 철 좀 있으라고 이름에 철자를 넣었나 봐요. 그래도 연기할 땐 꽤 진지해요.” 대단히 멋진 외모도 아니고, 폼나는 역할만 맡아온 것도 아니다. 오늘날 박철민을 만든 건 극중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코믹 연기와 함께 애드리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포는 항구다> 가오리의 “쉭쉭, 이건 입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여”를 시작으로 <뉴하트> 배대로 선생의 “자나깨나 뒤질랜드” 등이 대표적. 그렇다고 코믹한 배역만 맡은 것도 아니다. 최근 출연작인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는 엑스레이 작전에 투입된 남기성 역을 맡아 전쟁에 나선 가장을 연기했고, 요즘 한창 촬영 중인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는 악역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중이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넘나들며 그간 출연해온 작품만 해도 100편이 훌쩍 넘지만,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고작 10년이 좀 넘었을 뿐이다. 그의 연기인생을 이야기하자면 연극을 빼놓을 수 없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마흔 가까이 대학로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배우다. 지금도 연극 무대에 계속 오르는데, 2002년부터 15년째 공연을 이어가고 있는 <늘근 도둑 이야기>에 출연 중이다.

15년째 한 연극 무대에 계속 선다는 게 어려운 일 아닌가요
15년째 한 직장을 다니는 사람도 있고, 15년째 주방에서 우동국물만 끓여온 분도 계시지 않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15년이란 시간이 그리 대단하진 않죠. 하지만 보통의 연극은 2,3개월 공연하고 막을 내리니 특별한 의미이긴 하네요. 한 작품을 오랫동안 계속 공연한다는 건 관객들이 꾸준히 사랑해준다는 반증이니 감사하죠. 이 작품은 송강호, 이성민, 명계남 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거쳐간 작품이에요. 인권과 민주가 보장받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풍자와 해학이 깃든 이야기죠. 무대 위에서 광대가 될 때 스스로 자랑스럽고 대견해요.

매번 같은 무대에 오르다보면 매너리즘에 빠질 것 같은데
저도 그게 겁나요. 늘 긴장하죠. 한 달 전에 제 인생 최고의 공연을 했어요. 모든 관객이 완전히 몰입해서 함께 울고 웃어주시고 커튼콜에서 다들 기립박수를 쳐주시더군요. 어찌나 행복하던지 그 박수소리가 끝나기 전에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였어요. 3만5천원 주고 공연을 보러 오신 분들에게 그만큼의 돈을 더 얹어 돌려드리고 싶었어요. 그때의 감동을 잘 접어서 가슴 한켠에 간직하고 있어요. 이 연극은 제가 작아지고 약해지고 두려워지는 바보가 됐을 때, 언제나 에너지를 주고 좌절을 견디게 해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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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보다 동안인 이유가 있었네요
얼굴뿐 아니라 체력, 여러 가지로 동안이에요. 젊고 강하죠.

중앙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는데, 연기에 빠진 계기가 궁금해요
형이 어렸을 때 연기에 미쳤어요. 중고등학교 때 어머니 지갑에서 돈을 훔쳐 서울로 올라가서 연극을 보고 오곤 했죠. 뒤뜰에 절 앉혀놓고는 모노드라마로 연기를 했어요. 형의 완력에 끌려온 유일한 관객이 저였죠. 연극배우로 활동하다가 성우가 된 형이 20년 전 사고로 돌아가셨는데, 그 후에 연기를 해야겠단 의무감 같은 게 저도 모르게 생긴 것 같아요. 우리 형이 좋아한 걸 내가 하고 있으니까.

다들 연극무대는 배고프다던데 힘들진 않았나요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정신만은 힘들지 않았어요. 남들은 연극하면 배고프다는데, 저는 배부른 추억이 많아요. 라면을 먹을 때, 삼겹살을 먹을 때, 또 언제 먹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한 번에 많이 먹었기 때문에 늘 배불렀던 시기거든요.

그 시기에 결혼을 하셨는데, 아내는 어떤 분인가요
숙대 국문과 나와 극단에서 작가 생활을 했어요. 제가 무명배우였을 때,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할 때도 ‘돈 벌어와’ 한 적이 없고, 이제 돈을 좀 갖다 줘도 ‘돈 있어 좋다’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하는 사람이에요. 제가 연극배우를 하다 생활이 힘들어 잠깐 과일장사를 한 적이 있어요. 얼마 전에 노점에서 물건값을 좀 깎으려니까 아내가 그러더군요. “백화점에선 10원도 못 깎는 사람이 왜 노점에서 깎으려 하느냐, 당신도 장사 해봤는데 우리 노점에서는 제값 주고 물건 사자.” 이 말이면 어떤 사람인지 설명이 되려나요. 아내는 제 인생 최고의 선택이에요.

딸 둘에겐 어떤 아빠인가요
진짜 좋은 아빠예요. 큰딸이 대학교 4학년, 작은딸이 고등학교 2학년인데, 두 딸과는 친구처럼 잘 지내요. 남편으로선 마이너스이지만, 아빠로선 최고죠.

<인천상륙작전>이 7백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어요.
영웅의 이야기를 그린 액션 블록버스터이기 때문에 그간 보여드렸던 것과는 다르게 진지한 연기를 하려 노력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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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 두 딸이 심은하씨의 딸들이라고 들었어요
한 번도 못 만났어요. 함께 나오는 신이 없었거든요. 다들 나만 만나면 딸들이 예쁘냐, 심은하씨는 현장에 왔느냐고 묻는데 나도 몰라요. 영화 <이재수의 난> 때 심은하씨와 함께 출연한 후로 본 적이 없는데 나도 좀 보고 싶네요. 리암 니슨도 마찬가지예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리암 니슨이 이정재를 만날 때 대원들이 함께 나오기로 했는데, 그 장면이 추잡스럽다고 뺐어요. 얼마 전 리암 니슨이 한국에 왔는데, 배우들끼리 ‘촬영도 없는데, 가서 사진 찍고 껄떡거리지 말자’고 약속했어요. 근데 나 빼고 다 가서 사진 찍었더라고. 김선아, 이범수, 정준호 다 갔어! 혼자 지조 지키다 외톨이 됐어요. 합성이라도 할까 생각 중이에요.

진지한 연기 중에도 박철민식 유머코드를 군데군데 발견할 수 있었어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것에 나름 의미를 두고 계신 것 같아요
웃음은 바이러스라고 하잖아요. 다른 사람이 웃으면 나도 즐겁고 행복해져요. 내가 코미디언은 아니지만, 작품 안에서 누군가 나로 인해 웃으면 그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죠. 그걸 보고 ‘개드립이다’, ‘식상하다’고 지적하면 죽음보다 더 슬픈 고독에 빠지기도 하죠. 이번 영화에선 자식을 둔 채 전쟁에 나가는 가장이었어요. 죽음을 택한 군인이 코믹한 연기를 할 수는 없으니 많이 절제하고 생략했어요. 그동안 내가 한 연기들이 오버하고 과장된 부분이 많았는데, 그런 연기만 계속하다보면 연기 폭이 좁아질 수도 있겠다 싶어서 최근엔 코미디 연기를 해도 절제하고, 다양한 배역을 선택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지금 촬영 중인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선 악역이거든요. 철없이 까불어대는 철민이가 조금씩 달라지는 과정이라고 봐주세요.

영화 <혈의누>, <약장수>, 드라마 <하녀들> 등에서도 악역 연기를 했죠. 사람 좋은 푸근한 연기보다 악역 연기가 힘들진 않나요
악역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있어요. 관객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두렵게 하는 짜릿함 같은 거요. 사실 영화 <약장수> 시사회 끝나고 스스로에게 칭찬을 해줬어요. ‘너도 저런 매서운 눈빛과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너 아직 안 끝났다, 쓸모있다’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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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은 바이러스라고 하잖아요. 다른 사람이 웃으면 나도 즐겁고 행복해져요. 내가 코미디언은 아니지만, 작품 안에서 누군가 나로 인해 웃으면 그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죠. 그걸 보고 ‘개드립이다’, ‘식상하다’고 지적하면 죽음보다 더 슬픈 고독에 빠지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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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화를 잘 안 낼 것 같아요
다혈질이라 화를 잘 내요. 하지만 빨리 사과해요. 결혼 초반에는 싸우고 사과를 늦게 했어요. 6개월 동안 기본적인 대화만 나누는 형식적인 부부생활을 한 적도 있죠. 근데 너무 힘들고 피곤하더라고요. 요즘은 부부싸움하면 바로 미안하다고 카톡 보내요. 먼저 사과하는 게 이기는 거예요.
내 마음부터 훨씬 편해지거든. 세상 살면서 두 가지만 잘하면 돼요. 먼저,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 내가 만약 불의의 사고로 사람을 죽였어도 진심으로 미안해하면 상대방이 용서해요. 고마운 것도 마찬가지예요. 진짜 고마움을 전하면 상대방은 정말 행복하거든.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많은 후배 연기자들과 호흡을 맞추고 있어요. 후배들의 연기를 보면 어떤가요
경외감이랄까. ‘내가 저땐 과연 저렇게 했을까’ 싶은 생각에 창피하고 부끄러우면서 대견하고 부럽죠. 특히 보검이는 이미 인격이 완성된 놈이라 더욱 화가 나요. 본인 촬영 없을 때도 현장에 나와 분장팀을 도와줘요. 선배 상투 트는 걸 도와주는 후배가 어딨어요. 그것도 요즘 인기 최고인 스타인데,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인성이 정말 따뜻한 친구예요. 착함이 몸에 배어 있어요. 게다가 연기까지 갈수록 깊어지는 걸 보면 실은 같은 배우로서 질투가 나요.

이름 앞에 늘 붙는 ‘명품조연’, ‘신스틸러’라는 수식어는 어때요
나에겐 과분해요. 부담스럽죠. 앞으로 더 분발하라는 뜻 아닐까. 그 길을 향해가는 사람일 뿐이죠.

그래도 한 번쯤은 주연 욕심이 날 것 같은데
주연도 해봤죠. 하지만 내 그릇의 색깔, 크기, 질감, 느낌이 조연일 때가 훨씬 어울려요. 정상은 너무 좁고 잔인하잖아요. 물론 갈 수도 없지만. 지금 내가 하는 게 천직이라 생각하죠.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요
완벽한 연기를 하는 퍼펙트한 배우고 되고 싶은 건 아니에요. 엉성하기도 하고 모자라기도 한, 그래서 더 편하고 살갑게 느껴지는 배우가 될래요. 일요일 낮에 하는 <전국노래자랑> 보면 그렇잖아요. 실력이 안 갖춰진 아마추어들이 눈물나는 사연도 들려주고 박장대소할 이야기도 하면서, 엇박자를 내기도 하고 음정도 틀리죠. 그게 진짜 사는 거죠. 내 연기도 그런 방송을 닮고 싶어요. 어떠한 감정도 다 전해줄 수 있는, 삶의 희로애락을 말하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내 생애 마지막 날,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무대 위에서 혹은 카메라 앞에서 대사가 있든 없든 최선을 다해 연기하고 ‘어? 오늘 꽤 괜찮았네’ 하고 나름대로 만족한 다음 집에 오는 거예요. 그러곤 좋아하는 맥주에 소주 한잔 타서 마누라가 해주는 멸치볶음을 안주 삼아 털어 넣는 것. 그게 내가 그리는 내 마지막 날의 모습이에요.

에디터:이영민 | 월호:2016년 9월호 | 업데이트:201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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