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에서 못 보는 것이 아쉬운 1인, ‘사극 제왕’ 서인석

첫 등장부터 압도했다. 풀어헤친 백발과 흰 수염의 비주얼, 휘어질망정 부러질 각오의 강직함.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최영 장군은 오롯이 ‘사극 제왕’ 서인석의 것이었다.
“사극은 리얼리티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에요.
구축이 돼 있어야 한다고. 그걸 끌고 갈 수 있는
힘과 연기의 폭이 있어야 하고. 그래서 인생을 많이
살지 않고 사극을 접하면 소화하기가 힘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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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께서 고려의 임금이시라고요. 주상같이 호령을 해보세요. 어서요!” 최영 장군은 마치 포효하는 한 마리의 호랑이 같았다. <정도전> 첫 등장부터 그의 카리스마는 누구보다 강력했다. 백발과 흰 수염이 영화 <반지의 제왕>의 백발 마법사 간달프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최달프’라는 애칭까지 얻은 배우 서인석. 그는 지금까지 무려 15편의 사극에 출연해왔다. 퓨전이나 판타지 사극 말고. 서인석 없는 정통 사극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그 내공이 <정도전>에서 폭발했다. 첫 등장부터 마지막 유배길로 사라지기까지. 매회, 각 신마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최영 장군을 넘어서서 스스로 그 인물이 됐다. 올해로 데뷔 40년차, 배우 서인석을 만났다.

사극은 모두가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을 재해석해야 한다는 점에서 없는 인물을 창조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작업 같습니다. 최영 장군을 해석하면서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셨나요
최영 장군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각인된 장군이죠. 노래도 있잖아요. 사관학교에서도 최영 장군의 정신을 가르쳐요. 군인은 군인이어야지 다른 데 눈 돌리면 안 된다고. 그런 정신세계를 표현해야 하는 거야. 굉장히 고민 많이 했어요. 일단은 장군으로서 지닌 임무가 나라를 위해서 목숨 바친다는 것. 부를 창출하거나 권력을 가지려는 욕심에서는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그렇다면 외골수여야 되지 않겠느냐. 우유부단해서는 안 된다. 카리스마가 나와야 한다. 그렇게요. 첫 장면이 공민왕이 시해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는 것인데, 고려시대 제주도에서 올라오려면 20일은 넘게 걸렸겠죠. 그 길을 단숨에 달려간 거야. 그래서 머리도 그냥 풀어헤치고, 수염 기른 채 허겁지겁 나타난 거죠. 그랬더니 사람들이 간달프 같다고….(웃음)

<정도전>이 정통 정치 사극인데도 젊은층, 특히 여성들에게도 인기인데요. 출연 배우로서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우리가 정치를 안 하는 것 같지만 정치에 가장 민감한 게 또 국민들이거든. 정도전이 결국은 이성계와 더불어 조선을 건국하는, 브레인 역할을 하잖아요. 선조들이 나라를 경영하면서 겪은 시행착오들과 성공 사례, 그런 것들을 본보기로 삼아 현재의 정치에도 적용해보게 되죠. 이야기에는 픽션과 논픽션이 섞이게 되지만, 확실한 건 픽션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야. 픽션이라도 역사적 잣대를 놓고 재단해서 맞춰나갈 때 공감이 되고, 국민들이 관심을 갖고 본보기로 삼는 거죠. 그래서 배울 건 배우고 추릴 건 추리고 비교하는 재미가 있는 것 같아요.

명대사들로 유명했죠. 정현민 작가가 실제 정치 쪽의 경험이 있다는 사실도 화제였는데요
처음 만나는 젊은 작가인데 이분이 이거 하기 전에 국회의원 보좌관도 했어요. 그러니까 정치를 아는 거죠. 그런 경험을 고려 말기에서 조선이 건국되는 과정에 접목해나가는 것 같아. 드라마 보는 사람들은 그게 더 비교가 되고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아요.

오랜만에 중년 베테랑 연기자들의 합을 보는 재미도 대단했습니다
방송 드라마는 아무래도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서는 젊은 배우들, 스타들을 써야겠죠. 현대물은 어느 정도 리얼리티를 가질 수 있지만, 사극은 리얼리티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에요. 구축이 돼 있어야 한다고. 그걸 끌고 갈 수 있는 힘과 연기의 폭이 있어야 하고. 그래서 인생을 많이 살지 않고 사극을 접하면 소화하기가 힘들어요. 그래도 시청률 측면에서 젊은 친구들을 놓고 하는 건데, 이번에는 정도전(조재현)부터 나이가 많단 말이야. 후배지만 다 50대, 40대 후반이거든. 아무래도 경력이 있다보니 같이 연기하면서 주고받는 게 다르지. 내가 던지면 받아서 치고 하는 이런 맛은 연기력이 있어야 되거든.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아직도 젊어요. 최영 장군도 사실 나보다 나이 많은 선배들이 했어야 해.(웃음)

연세가 예순다섯이신데, 배도 하나도 안 나오고 날씬하셔서 놀랐어요
배우들은 몸 관리를 해야죠. 건강하게, 이왕이면 아름답게 할 필요도 있어. 운동 안 하면 안 된다고. 내가 <태조 왕건> 때 78kg이었는데, 그건 일부러 찌웠어요. 거구로 보여야 해서. 연기할 때는 살을 찌워도 되지만 평소에 그러면 견디기가 힘들어요. 나이 들수록 프로그램 딱 짜놓고 거기에 맞춰서 해야 해. 처음에는 러닝머신을 막 뛰었는데, 무릎이 아파서 이제는 속보로 시속 6.5km 정도로 빨리 걷는 거야. 땀을 쫙 빼고 난 다음 아령 20회씩 5회 반복하고, 벤치프레스 같은 거 조금씩 하고. 너무 힘들게 하면 또 안 돼. 그럼 운동이 아니라 노동이 되거든. 이 나이에 막 근육 보여주고 할 필요는 없으니까 건강하게 관리하는 거지.

술, 담배 많이 하신다고 들었어요
다 하지(웃음). 내가 원래 연극 출신이잖아요. 동아연극상 대상도 받았지. 무대 연기가 나의 모체예요. 술 얘기가 그렇게 나오는데(웃음). 작품 들어가서 레퍼토리 갖고 씨름을 하는데, 이게 그 역할을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거든요. 재창조지. 그런데 인물이 자꾸 접목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고, 고통이 따르고 하다보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죠. 그럼 술 한잔하면서 대화하고, 그러면 또 실마리가 풀리고. 그렇게 술 문화라는 게 있었던 거예요. 술이 없었으면 난 배우가 안 됐다고 생각해. 꼭 술이어야 되는 게 아니라 그 사이에서 뭔가 얻어지는 게 있더라고. 우린 그냥 얘기하면 마음을 잘 안 열어. 겉핥기지. 그런데 연출자나 작가들도 피상적으로만 하다가 술 한잔하면 마음을 열고 진심이 오가지. 대화가 더 깊어져요. 그게 습관화된 것 같아.

요즘 <꽃할배> 같은 예능에서 중견 연기자들이 주목받고 인기도 얻는데, 보면 어떤가요
기분 좋아요. 다 선배들인데, 나이 먹어서도 그런 걸 보여준다는 게 후배들한테도 귀감이고 살아 있다는 존재감도 되니까. 거기 다 결국 배우들이잖아요. 배우는 스타가 되기보다는 그렇게 평생 직업으로 가야 된다고. 슬럼프에 빠질 때도 있고, 30대는 좀 안 되다가도 40대, 50대에 포물선 그리면서 갈 수 있는 거니까. 인생이라는 게 어떻게 직선으로만 갑니까? 산을 타도 다시 내려갔다 올라갔다 정상으로 가는 거지. 그러니까 걱정 말고 살아봐. 대신 그냥 누워 있는 게 아니고 배우에 대한 끈은 놓지 말아야지. 그러다보면 늦게 개안이 되는 경우도 있고, 외모에서 드러나는 분위기도 나이 먹어서 오히려 찾아오는 부분도 있고. 자기가 개척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온다는 거지.

서인석이라는 배우, 어떻게 기억됐으면 하나요
나는 평생 배우를 한다는 각오예요. 많은 사람들이 서인석 하면 ‘배우에 인생을 바친 사람’이라고 기억했으면 하는 게 1번이고. 또 어떤 배우 하면 작품이 함께 떠오르잖아. 안소니 퀸 하면 <노틀담의 꼽추>도 있지만 <25시>의 멍청하면서도 순박한 모습도 떠오르는 것처럼. 그렇게 서인석 하면 뭔가 떠올라야 된다고. 그런 게 지금까지의 작품 중에 있는지 아니면 앞으로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앞으로 있기를 바라지(웃음). <태조 왕건>의 견훤, <정도전>의 최영…. 많은 작품, 많은 봉우리가 있었지만, 아직 에베레스트, 좀더 좋은 게 남아 있기를 바라는 거야. 거기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희망이 있기 때문에 사는 거니까.

그는 카메라 앞에서 낯설어했다. 그래서 사진을 찍지 않고 연기했다. 호통치고,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다가, 카메라를 노려봤다. 그대로 소름 돋는 연기였다. 이미 ‘사극의 제왕’이라는 칭호가 낯설지 않은 예순다섯 배우의 앞으로가 기대되는 이유는, 그가 아직도 배우이기를 열망하는 청년이기 때문이다. 그와 진하게 술 한잔하기로 했다. 33살 차이가 나는 기자는 설렌다.

[사진] 박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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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성영주 | 월호:2014년 6월호 | 업데이트:2014-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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